오전 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채서윤은 자리로 돌아오면서 그것을 느꼈다. 눈을 맞추지 않는 동료들, 화면을 향한 채 굳어 있는 김대리의 어깨, 복도 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들. 오리진 사무실의 공기는 평소에도 두껍고 건조했지만, 오늘은 그 위에 무언가 눅진한 것이 한 겹 더 얹혀 있었다. 서윤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모니터를 켰다. 화면에 반사된 자기 얼굴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비켰다.
어젯밤 아틀리에 뉨에서 나온 뒤로 아직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시혁의 작업실 안에서 맡았던 공기, 낡은 유리병들 사이를 떠돌던 냄새들, 그리고 그가 설명 없이 건넸던 시향지 한 장. 그것들이 밤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서윤은 그 감각이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팀장이 유리벽 너머 회의실에서 나왔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걸음이 조금 느렸다. 서윤은 그 속도를 보는 순간 이미 알았다. 좋은 이야기를 꺼낼 때 사람들은 저렇게 걷지 않는다.
"채 대리, 잠깐 시간 있어요?"
팀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날이 서 있으면 차라리 맞받아칠 수라도 있었다. 그 부드러움이 서윤을 늘 더 피곤하게 했다.
회의실로 들어서자 팀장은 문을 닫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인쇄된 자료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서윤은 그것이 무엇인지 대각선으로 읽었다. 해외 뷰티 업계 동향 보고서. 세 번째 단락에 굵게 표시된 문장이 보였다. 서윤이 지난달 기획안에서 썼던 표현과 거의 같은 방향이었다.
"봤어요? 이번에 유럽 쪽 브랜드가 비슷한 컨셉으로 론칭했대요. 스토리텔링 기반 향수. 반응이 꽤 좋다고 하더라고요."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팀장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좀 아쉽긴 했죠. 채 대리 안이 방향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거고."
타이밍. 서윤은 그 단어를 속으로 한 번 굴렸다. 지난 보고에서 팀장은 "이 방향은 국내 소비자한테 너무 낯설다"고 했었다. 그 전에는 "데이터가 없다"고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타이밍이었다. 이유가 계속 바뀌었지만 결론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래서요?"
서윤은 짧게 물었다. 팀장이 약간 멈칫했다.
"그래서, 뭐. 우리도 이 방향으로 빠르게 검토를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본부장님도 이 자료 보시고 관심을 가지셨거든요. 다음 주 본부장 보고에 이 방향으로 초안을 올려야 해서요. 채 대리가 이 쪽을 제일 오래 들여다봤으니까 자료 정리를 좀 도와줬으면 해서요."
서윤은 테이블 위 자료를 다시 내려다봤다. 유럽 브랜드의 론칭 스토리. 감각을 기억으로, 기억을 향으로 연결하는 방식. 자신이 여섯 달 전부터 써온 언어들이 다른 나라 기획자의 문장 속에 들어가 있었다.
"자료 정리요."
"네. 채 대리 아이디어를 완전히 버리는 게 아니라, 이 사례를 참고해서 좀 더 현실적인 방향으로 다듬어 보자는 거예요. 팀 차원에서 같이 하는 거니까."
팀 차원에서 같이. 서윤은 그 말도 속으로 씹었다. 팀 차원에서 같이 하는 작업인데 자료 정리를 맡아달라는 말을 채 대리 혼자에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업의 씨앗이 채 대리 본인의 기획안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초안 작성자가 누구였는지는 본부장 보고서에 적히지 않을 것이었다.
서윤은 입을 열었다.
"제 기존 기획안 기준으로 정리하면 되나요?"
팀장이 잠깐 멈췄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 뭐. 기본 방향은 비슷하겠지만 이번엔 해외 사례를 중심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요. 제가 작년에 올렸던 안이 이번 자료의 출발점이 되는 건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 쓰는 건지."
팀장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같이 발전시키는 거죠. 채 대리도 이 방향이 맞다고 생각했던 거잖아요."
서윤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일어섰다. 팀장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덧붙였다.
"이번 주 안으로 초안 정도만 잡아주면 돼요. 어렵지 않을 거예요, 채 대리가 제일 잘 아는 내용이니까."
제일 잘 아는 내용이니까. 서윤은 회의실 문을 열면서 그 말이 얼마나 이중적인 문장인지를 생각했다. 제일 잘 아니까 쓴 기획안이 기각됐고, 제일 잘 아니까 이제 그 기획을 다른 이름으로 다듬는 일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사무실 안의 시선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김대리는 화면 쪽을 보고 있었지만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았다. 옆자리 박과장은 전화기를 들고 있었지만 통화 중인 것 같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게 오리진의 방식이었다. 이 조직 안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잃을 때 나머지는 조용히 시선을 거뒀다. 나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방식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서윤은 의자에 앉아 화면을 바라봤다. 손이 키보드 위에 얹혔지만 아무것도 치지 않았다.
자기 기획을 잃는 것은 이미 익숙했다. 기각당하는 일도, 방향을 다듬으라는 말도.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지금 팀장이 요청한 건 기각이 아니었다. 서윤의 감각이 맞았다는 사실이 외부 사례로 증명된 직후, 그 감각의 출처를 지우고 팀의 이름으로 덮어씌우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채 대리가 제일 잘 아는 내용이니까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 초안은 다음 주 본부장 보고서에 올라갈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서윤은 혼자 건물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사서 건물 옆 계단에 걸터앉았다. 늦가을 햇살이 옅었다. 바람이 찼다.
삼각김밥 포장지를 뜯으면서 서윤은 어젯밤 시혁의 작업실을 생각했다. 그 공간이 얼마나 다른 온도였는지. 회사 안에서는 감각이 쓸모를 증명해야만 존재할 수 있었는데, 그 작업실에서는 감각 자체가 이미 존재의 이유였다. 시혁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설명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향을 맡아보라고 했고, 서윤이 반응하자 그 반응을 그대로 들었다.
그게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오후 업무는 멈춘 것처럼 느렸다. 서윤은 팀장이 요청한 자료를 열어봤다가 닫았다. 화면 위에서 커서가 깜빡이는 동안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두드렸다. 리듬이 없는 두드림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팀원들이 하나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박과장이 코트를 걸치며 지나가다 서윤의 책상 옆에서 잠깐 멈췄다.
"오늘 팀장님이랑 이야기 잘 됐어요?"
서윤은 올려다봤다. 박과장의 표정은 걱정인지 탐색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네, 뭐."
"힘들죠. 그런데 이번 기회에 잘 정리해두면 나중에 채 대리한테도 좋을 거예요. 이런 사례 정리 경험이 쌓이면."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과장은 잠깐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그냥 걸어갔다. 자기 아이디어를 남의 보고서 배경으로 다듬는 일이 경험이 된다는 말이었다.
김대리가 마지막으로 나가면서 서윤을 한 번 돌아봤다. 눈이 잠깐 마주쳤다가 떨어졌다.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지 않은 것 같았다. 위로도 아니고 동의도 아닌, 그냥 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서윤은 혼자 남아 화면을 봤다. 열려 있는 파일은 팀장이 전달한 해외 사례 보고서였다. 어느 조향사가 어머니의 정원 냄새를 기억해서 만든 향수. 그 향수에 편지 한 장을 함께 넣었고, 고객들이 그 편지를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브랜드가 살아났다는 이야기.
서윤은 그 문단을 읽으면서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이 작년 초에 오리진 기획안에 썼던 문장들이 머릿속에 겹쳤다. 향수는 제품이 아니라 기억의 매체여야 한다. 구매가 아니라 사연이 먼저다.
그때 팀장은 소비자 조사 데이터가 없다고 했다.
서윤은 파일을 닫지 않았다. 대신 화면 왼쪽 구석에 접어 뒀던 다른 폴더를 열었다. 작년 초 기획안 파일이었다. 문서를 열자 첫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기획 담당 채서윤. 서윤은 그것을 몇 초 동안 바라봤다가 폴더를 닫고 컴퓨터 전원을 껐다.
가방을 어깨에 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위에 팀장이 남긴 메모 한 장이 있었다. 이번 주 안으로 초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윤은 그것을 한 번 내려다보다가 접어서 가방 안에 넣었다. 두고 나가는 것과 가져가는 것은 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윤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피곤해 보였다. 눈 아래가 어두웠고 표정이 납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 건물 안에서 자기 얼굴이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로비를 나서자 바람이 얼굴에 먼저 닿았다. 차가웠다. 서윤은 코트 단추를 잠그면서 걸었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언덕 쪽으로 향했다. 회사 방향이 아니었다. 지하철역 방향도 아니었다. 오늘은 시혁이 작업실에 있을 시간이었다. 어젯밤 작업실을 나오면서 딱히 다음 약속을 잡지는 않았지만, 서윤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았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숨이 조금 찼다. 저녁 공기가 차고 건조했다. 골목 사이로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서윤은 걸으면서 오늘 회의실에서 팀장이 했던 말들을 다시 정리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팀 차원에서 같이. 채 대리가 제일 잘 아는 내용이니까. 그 문장들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서윤은 이제 선명하게 알았다. 기회를 놓친 건 팀의 판단이었고, 그 판단의 결과를 정리하는 일은 서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의 출처는 자연스럽게 지워질 것이었다. 본부장 보고서에 이름이 올라가는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었다.
아틀리에 뉨 건물이 보였다. 2층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서윤은 계단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그냥 계단을 올랐다. 문 앞에서 노크를 두 번 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시혁이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작업복 차림이었고 손에 시향지가 들려 있었다.
"왔어."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확인이었다. 서윤은 그 말이 이상하게 편했다.
"응."
시혁은 문을 더 열었다. 서윤이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실 안에는 어젯밤과 다른 냄새가 떠 있었다. 조금 더 날카롭고 건조한 향이었다. 시혁이 오늘 다른 작업을 했다는 걸 서윤은 냄새로 먼저 알았다.
시혁은 서윤을 보지 않고 말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숨을 더 짧게 쉬네."
서윤은 잠깐 멈췄다. 자신이 숨을 얕게 쉬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그래?"
"응. 계단 탓만은 아닌 것 같고."
시혁은 작업대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서윤은 어젯밤에도 앉았던 낡은 의자를 끌어당겼다.
"뭐 하고 있었어?"
"베이스 노트 조합 다시 보는 중."
잠시 침묵이 있었다. 시혁이 시향지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서윤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 기획이 맞았다는 게 해외 사례로 증명됐어. 그래서 팀장이 그 자료 정리를 나한테 시켰어. 다음 주 본부장 보고에 올린다고."
시혁이 손을 멈췄다.
"자료 정리."
"응. 내 아이디어 방향인데 이제 팀 이름으로 다시 쓰는 거. 나한테 제일 잘 아는 내용이라서."
서윤은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웃기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 말을 소리 내어 하니까 오히려 좀 우스웠다.
시혁은 시향지를 내려놓았다. 서윤 쪽을 봤다.
"네가 제일 잘 안다는 말이 제일 나쁜 말이네."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한 문장이 오늘 하루 들었던 어떤 말보다 정확하게 박혔다. 팀장도, 박과장도 같은 말을 했지만 전혀 다르게 들렸다. 시혁의 말에는 그 구조가 왜 나쁜지에 대한 판단이 들어 있었다.
"거절했어?"
"아직. 근데 오늘 회의실에서 물어봤어. 내 기존 기획안 기준으로 정리하면 되냐고."
시혁이 눈썹을 조금 올렸다.
"뭐라고 하던."
"같이 발전시키는 거라고. 얼버무렸어."
시혁은 더 묻지 않았다. 서윤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추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윤에게는 이상하게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 사람 앞에서는 결론을 미리 내지 않아도 됐다.
시혁이 일어나서 작업대 뒤쪽 선반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서윤 앞에 놓았다. 서윤이 뚜껑을 열었다. 차갑고 선명한 향이 올라왔다. 숲 속 이른 아침 같은 냄새였다. 이슬이 맺히기 직전의 공기.
"이게 뭐야?"
"오늘 새로 만들었어. 아직 이름 없어."
서윤은 병을 손에 들고 다시 맡았다. 향이 코를 통해 들어오면서 머릿속의 어떤 매듭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동안 목 안쪽 어딘가에 쌓여 있던 것들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좋다."
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작업실 안에 향기만 조용히 떠 있었다.
서윤은 유리병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으면서 생각했다. 이 공간과 회사 사무실이 어떻게 같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오후 내내 모니터 앞에서 납작해졌던 것들이 여기 오면 조금씩 다시 부피를 찾았다. 그게 시혁 때문인지 이 공간 때문인지 향기 때문인지 서윤은 아직 구분하지 못했다. 아마 셋 다일 것이었다.
"나, 오래 있어도 돼?"
서윤이 물었다.
시혁은 이미 시향지를 다시 들고 있었다.
"응."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짧음이 어떤 긴 말보다 더 분명했다. 서윤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창문을 스쳤다. 작업실 안은 조용했고, 향기는 계속 공기 속에 있었다.
서윤은 그날 밤 꽤 오래 거기 있었다. 시혁은 작업을 계속했고 서윤은 그 곁에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서윤은 가방 안에서 팀장의 메모를 꺼냈다. 이번 주 안으로 초안. 그 종이를 손 안에서 한 번 접었다가 펼쳤다. 그리고 가방 옆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버리지 않았다.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이번엔 그냥 넘기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 말을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여기서라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