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21세기를 본다면: 단편집

EP.1 해고 통보식

행사장 조명은 아직 사람을 비추기 전부터 사람보다 자신이 먼저 중요한 것처럼 뜨거웠다. 천장에 매달린 흰 등들은 무대 중앙의 투명한 프롬프터 유리를 향해 내려왔고, 그 빛 아래에서 앨런 브라이트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이 회사에서 배운 가장 비싼 태도였다. 종이도, 펜도, 물병도 없이 서 있으면 그는 미래 자체가 자신의 입을 빌려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박서윤은 무대 왼편의 검은 장막 뒤에서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화면에는 마지막 연설문이 열려 있었다. 제목은 단순했다. A More Human Future. 더 인간적인 미래. 그 문구는 지난 석 달 동안 회사 안의 여러 방을 지나며 조금씩 살이 붙고, 깎이고, 씻겨 나갔다. 처음에는 “AI와 인간의 공존”이었다가, 법무팀이 공존이라는 말은 노동 대체 논의를 불러온다고 했다. 다음에는 “인간 역량의 확장”이 되었으나, 제품팀 부사장이 너무 낡은 말이라고 했다. 어제 새벽 두 시 십칠 분, 서윤이 욕실 바닥에 앉아 발목 부기를 문지르며 쓴 문장이 지금 무대 뒤에서 빛나고 있었다. 더 인간적인 미래. 앨런은 프롬프터를 따라 읽었다. “우리는 기술이 사람을 대신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의 더 깊은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돕는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잠시 멈추고 객석을 바라보았다. 아직 객석에는 투자자 좌석을 표시한 흰 종이와, VIP 라운지로 이어지는 동선 표식, 케이블을 테이프로 감는 무대 스태프 둘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환호를 듣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좋아요.” 행사 대행사 직원이 말했다. “딱 좋아요. 조금만 더 따뜻하게요.” 따뜻하게. 서윤은 그 말을 태블릿 메모에 적었다. 따뜻하게라는 말은 홍보팀에서 자주 쓰였지만, 실제 온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따뜻한 문장은 대개 차가운 결정을 사람이 견딜 수 있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따뜻한 발표문, 따뜻한 공지, 따뜻한 사과, 따뜻한 전환. 회사에는 냉장고가 충분했고, 회의실마다 유리벽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오래된 양심을 새 노트북처럼 조용히 닫을 줄 알았다. 그 모든 것 위에 따뜻함이 놓였다. 앨런이 다시 말했다. “사람이 자기 안의 더 깊은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돕는 세상.” 그는 문장을 마음에 들어 했다. 서윤은 그걸 알 수 있었다. 어떤 CEO들은 숫자를 믿고, 어떤 CEO들은 자신이 숫자를 뛰어넘는다고 믿었다. 앨런은 후자였지만, 전자의 숭배를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소리치지 않았고, 회의에서 사람의 말을 끊을 때도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 때문에 직원들은 더 오래 기다렸다. 그가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와 함께 일하는 일을 더 어렵게 했다. 서윤의 배 안에서 아이가 작게 움직였다.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안쪽에서 누군가가 물속의 얇은 천을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배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태블릿 화면을 잠갔다. 행사장은 오전 열한 시에 열리고, 열한 시 사십 분에 앨런의 기조연설이 시작되며, 정오에는 신제품 시연이 있고, 오후 두 시에는 직원 전체 타운홀이 있었다. 투자자와 언론은 오전의 말을 듣고, 직원들은 오후의 말을 듣는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날 벌어지는 두 의식은 서로 다른 출입증을 요구했다. 홍보 워룸은 행사장 뒤편 임시 회의실에 있었다. 길고 낮은 테이블 위에는 충전 케이블, 식어가는 커피, 포장 샐러드, 법무팀이 표시한 빨간 주석이 붙은 문서들이 흩어져 있었다. 창문은 없었고, 벽에 붙은 대형 모니터에는 세 개의 카운트다운이 떠 있었다. 하나는 기조연설까지 남은 시간, 하나는 언론 브리핑까지 남은 시간, 하나는 “workforce transition notification” 발송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해고 통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윤, 이 문장 좀 봐줘요.” 법무팀의 톰이 말했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하지 않았다. 회사가 편안한 문화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고위직 남자들이 넥타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윤은 오래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다. “We regret to inform you는 너무 오래됐고, 너무 법원 서류 같아. 하지만 we’re sorry는 liability가 있어요.” 서윤은 톰의 노트북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허리가 당겼고, 배 아래쪽에 무거운 압력이 있었다. 문서 첫 줄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오늘 우리는 어려운 조직 재편 결정을 공유합니다. 그녀는 커서를 놓고 한참 보았다. 어려운 결정. 공유합니다. 조직 재편. 그 말들은 각각 자기 방어의 작은 방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운 결정은 결정한 사람의 고통을 먼저 알렸고, 공유합니다는 당하는 사람에게 참여의 모양을 씌웠으며, 조직 재편은 사람이 아니라 도표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너무 건조한가요?” 톰이 물었다. “건조하진 않아요.” 서윤이 말했다. “너무 익숙해요.” “익숙하면 안전하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전하다는 말도 회사 안에서는 이상한 말이었다. 누구에게 안전한가. 소송에서 안전한가, 주가에서 안전한가, 해고 통보를 받는 사람이 부엌 의자에 앉아 자기 아이에게 오늘부터 보험이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야 하는 그 순간에도 안전한가. 그러나 이런 질문은 회의의 흐름을 방해할 뿐이었다. 회의의 흐름이라는 것은 언제나 가장 상처받지 않는 사람들의 속도였다. 서윤은 첫 줄을 고쳤다. 오늘 우리는 회사의 다음 단계와 관련된 매우 어려운 결정을 전합니다. 전합니다. 공유합니다보다 덜 뻔뻔했다. 그러나 전한다는 말에도 손은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건네는지, 그 건넴이 사람의 식탁과 처방전과 자동차 할부금 위에 어떻게 떨어지는지는 없었다. 모니터 오른쪽 화면에는 해고 대상자 분포가 떠 있었다. 총 3,184명. 엔지니어링 1,102명. 세일즈 638명. 운영 421명. 고객지원 593명. 기타 430명. 그래프는 파란색과 연두색으로 예뻤다. 나쁜 숫자는 예쁜 색을 입으면 잠시 회의실에 잘 어울렸다. “고객지원 쪽 반응이 제일 셀 겁니다.” 인사 담당 부사장 마야가 말했다. “그 팀은 이미 야간 근무 축소 때문에 예민해요.” “그래도 generous package예요.” 재무 담당자가 말했다. “시장에서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요.”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 듯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잔인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들은 잔인함을 개인적 성격으로만 이해했고, 그러므로 자신들이 정중하고 피곤하고 합리적이면 잔인함은 어디에도 없다고 여겼다. 서윤의 휴대폰이 무음으로 울렸다. 병원이었다. 그녀는 화면을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지난주 초음파 검사 후 보험 청구가 일부 거절되었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의학적 필요성 추가 확인 필요.” 그 문장은 회사의 해고 통보문보다 더 짧고 더 완벽했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사도, 태아도, 서윤도 없었다. 필요성만 있었다. 추가 확인만 있었다. 그녀는 남편 민재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험 또 문제 생겼어. 나중에 전화할게. 곧 답이 왔다. 괜찮아? 오늘 무리하지 마. 점심 먹었어? 그녀는 식어버린 샐러드를 보았다. 플라스틱 뚜껑 안쪽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포크는 아직 포장지 안에 있었다. 먹었어. 거짓말은 너무 작아서 죄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들은 하루를 지탱하는 못 같았다. 하나를 빼면 무너지는 것이 있었다. 오전 행사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앨런은 무대 위에서 부드럽고 신중했으며, 제품 시연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화면 속 AI 비서는 암 환자 가족을 위한 보험 서류 정리를 돕고, 교사의 수업 계획을 줄여주고, 소규모 사업자의 회계 실수를 찾아냈다. 객석 앞줄의 투자자들은 손뼉을 쳤고, 기자들은 노트북을 두드렸다. 앨런은 마지막에 손을 가슴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기술은 차가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기술은 사람의 시간을 돌려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순간 서윤은 자신이 어제 이 문장을 썼을 때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철분제 병을 기억했다. 병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갈색 알약 몇 개가 굴러나와 있었고, 민재가 잠결에 그것을 밟고 아프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때도 문장을 고쳤다. 사람의 시간을 돌려주기 위해. 그 문장을 쓰느라 자신의 새벽 두 시간을 잃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다. 어떤 생각들은 너무 하찮아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견디기 어렵다. 행사 뒤편 복도에서 앨런은 언론팀과 사진을 찍었다. 그는 서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훌륭했어요, 서윤. 특히 마지막 문장.” “고맙습니다.” “오늘 오후 건도 최대한 인간적으로 갑시다.” 그는 진심이었다. 서윤은 그것을 알았다. 그의 눈에는 피곤함이 있었고, 피곤함을 자기 도덕성의 증거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나쁜 습관도 있었다. 그는 지난주 회의에서 해고 규모를 듣고 정말로 얼굴이 어두워졌다. 직원들의 이름을 몇 명 기억했고, 오래전 입사 초기에 함께 피자를 먹던 이야기도 했다. 그런 다음 그는 말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남아야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살아남는다는 말은 회사가 쓰면 이상한 빛을 냈다. 수백억 달러의 현금성 자산을 가진 법인이 살아남는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월세를 내야 하는 사람의 살아남음과 같은 단어를 쓰면서 전혀 다른 몸을 가졌다. 오후 한 시 오십이 되자 워룸의 공기가 바뀌었다. 오전의 반짝이는 말들이 아직 행사장 카펫 위에 남아 있었지만, 이 방에서는 이미 다른 의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사팀은 발송 시스템을 열었고, 법무팀은 마지막 문구를 확인했으며, 사내 커뮤니케이션 팀은 타운홀 채팅 권한을 “질문 제출만 가능”으로 바꿨다. 직원들은 말할 수 없고, 질문을 제출할 수 있었다. 질문은 선별될 수 있었다. 선별된 질문은 회사의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서윤은 마지막 통보문을 읽었다. 오늘 우리는 회사의 다음 단계와 관련된 매우 어려운 결정을 전합니다. 이 결정의 영향으로 귀하의 역할은 종료됩니다. 귀하가 지금까지 보여준 헌신과 기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이 전환이 개인과 가족에게 중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가능한 한 세심하게 지원하겠습니다. 그녀는 “역할은 종료됩니다”에서 멈췄다. 역할. 사람이 아니라 역할. 역할은 종료될 수 있었다. 사람은 집에 가야 했다. “이 부분,” 그녀가 말했다. “귀하의 역할은 종료됩니다. 너무 비인간적이에요.” 톰이 이마를 문질렀다. “직접적으로 employment is terminated라고 쓰면 더 세요.” “귀하는 오늘부로 고용이 종료됩니다는요?” “그건 더 세죠.” “그럼 사람이 해고됐다는 걸 말하지 않으면서, 사람이 해고됐다는 걸 알려야 하네요.”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모두가 그 말이 공격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고, 사실은 공격보다 처리하기 어려웠다. 마야가 부드럽게 말했다. “서윤, 우리 다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필요한 정보를 명확히 받아야 해요.” 사람들이 필요한 정보.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정보는 퇴직금, 보험 지속 기간, 장비 반납, 시스템 접속 종료 시각, 이의 제기 불가 조항, 재취업 지원 링크였다.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누가 왜 이들을 선택했는지, 어제까지 우수 평가를 받은 사람이 오늘 왜 불필요해졌는지, 회사가 오전에는 인간의 시간을 돌려준다고 말하고 오후에는 사람의 시간을 끊어내는 이유였다. 타운홀이 시작되었다. 앨런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 오전 무대보다 작은 사각형 안에서 그는 더 피곤하고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위험했다. 그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 회사 역사상 가장 어려운 날 중 하나입니다.” 서윤은 그의 입술 움직임과 스크립트의 문장을 동시에 보았다. 그는 거의 틀리지 않았다. 채팅창은 잠겨 있었지만, 반응 이모지는 잠시 열려 있었다. 슬픈 얼굴, 하트, 기도하는 손, 분노한 얼굴이 빠르게 올라왔다가 곧 비활성화되었다. 화면 오른쪽에는 직원들이 제출한 질문들이 내부 도구로 쌓였다. 왜 오전에는 채용 공고가 올라왔나요? 제 매니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맞나요? 저는 육아휴직 중입니다. 제 보험은 어떻게 되나요? 비자 스폰서십은요? 여기서 9년 일했습니다. 한 통의 이메일인가요? 서윤은 마지막 질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 통의 이메일인가요. 그 문장은 질문이라기보다,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는 사람의 손잡이 같았다. 인사팀 직원이 질문을 분류했다. Benefits. Immigration. Severance. Manager Process. Duplicate. Duplicate. Duplicate. 중복. 화면 아래 작은 창에 한 직원의 얼굴이 잠깐 떴다. 시스템 오류인지, 아니면 누군가 권한을 잘못 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중년의 흑인 남자였고, 뒤쪽 벽에는 아이가 그린 듯한 우주선 그림이 붙어 있었다. 이름표에는 Marcus Hill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화면에 나온 줄 모르는 듯 아래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Dad?” 하고 부르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곧 화면은 꺼졌다. 마커스 힐. 서윤은 그 이름을 명단에서 찾아보았다. 고객지원 야간팀. 애틀랜타. 근속 6년 4개월. 최근 평가: exceeds expectations. 메모: team morale anchor. 팀 사기의 중심.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Ana Morales. 데이터 라벨링 운영. 피닉스. 근속 2년 1개월. 특이사항: maternity leave scheduled June 2026. 서윤은 배를 만졌다. 아이는 조용했다. 그녀는 아나 모랄레스라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이 이메일을 열게 될지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상상은 업무 속도를 늦추고, 업무 속도가 늦어지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더 나쁜 문장을 넣을 수도 있었다. 이것이 그녀가 자기에게 허락한 변명이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더 나빠진다. 이 변명은 유능한 사람들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었다. 민재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회의실 밖 복도로 나갔다. 복도 끝에서는 행사 철거가 시작되고 있었다. 흰 꽃 장식이 검은 플라스틱 통에 담겼고, 오전에 기자들이 앉았던 의자들이 접혀 벽에 기대어졌다. “여보.” 민재의 목소리가 낮았다. “병원에서 나한테도 전화 왔어. 추가 서류 내면 될 것 같대. 근데 다음 달 검사 비용은 먼저 결제해야 할 수도 있대.” “얼마?” 그가 잠시 망설였다. “삼천팔백 정도.” 서윤은 벽에 손을 짚었다. 금액은 아주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었다. 사람을 파괴하는 금액들은 대개 뉴스가 되기에는 작고, 한 가정을 조용히 밤새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알겠어. 내가 처리할게.” “당신 괜찮아?” “응.” “오늘 그거 하는 날이지?” 그거. 민재는 해고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회사 사람이 아니었지만, 회사 사람들이 말을 피하는 법을 배운 사람처럼 조심했다. “응.” “당신이 결정한 거 아니잖아.”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 바닥에는 오전 행사에서 떨어진 은색 종이 조각 하나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의 구두 밑창에 밟혀 납작해진 채 빛을 조금 반사했다. “서윤?” “나중에 전화할게.” 그녀는 전화를 끊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당신이 결정한 거 아니잖아. 그 말은 위로였고, 위로이기 때문에 불충분했다. 인간은 자기가 결정하지 않은 일에도 참여하며 산다. 서명하지 않았으나 문장을 고치고, 버튼을 누르지 않았으나 버튼이 눌릴 수 있도록 시간을 맞추고, 명단을 만들지 않았으나 명단이 사람에게 도착할 때 덜 거칠게 보이도록 가장자리의 피를 닦는다. 워룸으로 돌아왔을 때 통보 발송까지 7분 남아 있었다. “최종 확인 필요합니다.” 인사팀 직원이 말했다. “서윤, subject line만 봐주세요.” 메일 제목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Your Role at HelixMind 서윤은 그것을 보았다. 당신의 역할. 회사는 끝까지 사람에게 직접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는 커서를 제목 줄에 놓았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Important Update Regarding Your Employment 더 명확했다. 더 차가웠다. 더 정직한가? 정직이라는 말이 여기에 들어올 자리가 있는가? 정직이란 단지 상처를 더 빨리 주는 방식이 아니라, 상처의 주체를 숨기지 않는 일이어야 했다. 그러나 제목 줄 하나로는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었다. 제목 줄 하나로는 마커스 힐의 아이가 부른 “Dad?”를, 아나 모랄레스가 병원 예약표를 보며 계산할 보험 기간을, 서윤 자신의 배 안에서 조용히 떠 있는 아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서윤?” 마야가 불렀다. 그녀는 제목을 바꾸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발송 버튼은 인사팀 시스템 안에 있었고, 실제로 누른 사람은 서윤이 아니었다. 젊은 운영 매니저가 두 단계 인증 코드를 입력하고, 법무팀의 고개 끄덕임을 확인한 뒤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버튼이 눌리는 순간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자기 손가락을 조금씩 본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3,184개의 이메일이 나갔다. 모니터에는 발송 성공률이 표시되었다. 17퍼센트, 42퍼센트, 81퍼센트, 100퍼센트. 숫자는 놀라울 만큼 빨리 올라갔다. 한 사람의 삶에서 한 문장이 도착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회사의 서버가 건강할수록 짧았다. 타운홀은 계속되고 있었다. 앨런은 지원 패키지와 감사와 어려움과 미래를 말했다. 그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칭찬받을 것이다. 마야는 FAQ 링크를 올렸고, 톰은 법적 표현이 정확히 지켜졌는지 확인했다. 누군가 샐러드 뚜껑을 닫았다. 누군가 커피를 새로 따랐다. 회사는 비극 뒤에도 운영되어야 했고, 운영된다는 사실이 회사가 비극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서윤은 노트북을 닫지 못했다. 해고 대상자 명단 파일이 아직 열려 있었다. 행들은 너무 많아 화면 아래로 끝없이 내려갔다. 이름, 부서, 지역, 근속, 상태. 사람을 표로 만들면 사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보는 사람이 오래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지갑 안에는 어제 병원에서 받은 초음파 사진이 있었다. 흑백의 흐린 작은 형체. 의사는 여기 심장이 보이죠, 하고 말했다. 서윤은 그때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눈물 대신 계산이 먼저 왔다. 보험, 휴직, 프로젝트 일정, 대체 인력, 모기지. 그리고 그 계산이 먼저 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잠시 자신을 미워했다. 그러나 지금 명단 위에 초음파 사진을 꺼내 놓자, 그녀는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계산 속에 넣고 살았다. 문제는 계산을 하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사랑이 계산 없이 살 수 없도록 만든 세계의 침착함이었다. 마커스 힐의 행이 화면 가운데 있었다. 아나 모랄레스의 행은 그 아래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 둘 사이에도 수십 명이 있었다. 이름들은 서로 모르겠지만, 오늘 오후 같은 문장을 받았다. 귀하의 역할은 종료됩니다. 서윤은 통보문 마지막 문장을 다시 열었다. 우리는 여러분의 다음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 문장은 오전의 “더 인간적인 미래”와 닮아 있었다. 너무 매끄러웠고, 너무 쉽게 지나갔다. 그녀는 커서를 문장 끝에 놓았다. 지울 수도 있었다. 고칠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라고 넣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들어가면 회사가 더 인간적으로 보일 뿐, 사람이 덜 해고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았고, 안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회의실 밖에서 철거 카트가 지나갔다. 바퀴 하나가 고르지 않은 바닥 틈에 걸려 덜컹거렸다. 누군가 웃으며 조심하라고 말했다. 오후 빛은 창문 없는 방 안까지 들어오지 못했고, 모니터의 푸른빛만 서윤의 손등과 초음파 사진의 흰 가장자리에 닿았다.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고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배 안에서는 아이가 다시 한 번 아주 작게 움직였고, 화면에는 아직 닫히지 않은 명단이 조용히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