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지 말지 망설이는 밤이었다.
퇴근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도 도시는 쉽게 식지 않았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헤드라이트가 얇은 물막을 밀어내며 번졌다. 채서윤은 버스 정류장 유리벽에 등을 기대고 한 손으로 휴대폰 화면을 넘겼다. 오전 회의에서 기각된 기획안 파일이 아직도 메신저 창 위에 떠 있었다. 몇 번을 읽어도 결론은 같았다. 감각이 없어서 밀린 게 아니었다. 설명할 힘이 닳아서 밀린 거였다.
“요즘 소비자는 스토리보다 즉시성입니다.”
팀장이 회의실에서 하던 말을 떠올리자 서윤은 무의식적으로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즉시성. 바이럴. 대중성. 안전한 카피. 회의실 안에선 늘 비슷한 단어들이 돌아다녔고, 이상하게도 그런 말들 사이에 오래 앉아 있으면 사람이 점점 둔해졌다. 좋아하는 향 하나를 설명하던 예전의 자신이 꼭 다른 사람 같았다.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입사 동기이자 유일하게 회사를 사람답게 버티게 해 주는 윤소희의 메시지였다.
‘아직 회사 근처야? 또 야근했지.’
‘응. 이제 나가.’
‘집 바로 가지 마. 얼굴 망했다. 카페라도 가.’
‘그럴 기분 아니야.’
‘그럼 더 가. 너 그런 날 혼자 있으면 생각만 많아져.’
서윤은 피식 웃었다. 꼭 옆에서 본 것처럼 말한다. 답장을 치려다 멈췄다. 집에 가도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머리 안쪽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이런 날은 억지로 눕는 것보다 조금 걷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우산도 펴지 않은 채 천천히 언덕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예전부터 그 동네에는 늦게까지 불이 켜진 작은 카페 하나가 있었다. 회사와 집의 중간쯤, 일부러 찾아가진 않지만 지치면 가끔 발길이 닿는 곳. 창문 밖에서 보면 꼭 밤공기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근처 사람들은 그냥 언덕 위 카페라고 불렀다.
골목 끝을 돌자 익숙한 나무 간판이 보였다. 따뜻한 노란빛이 젖은 계단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구 옆 좁은 지붕 위에는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카페 주인이 붙여 놓은 이름표에는 작게 뉨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양이는 서윤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흥미 없다는 듯 눈을 반쯤 감았다.
“넌 좋겠다. 퇴근이 없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문을 밀고 들어간 순간, 서윤은 아주 미세한 향을 먼저 맡았다. 막 갈아낸 원두 냄새, 젖은 나무 냄새,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 섞여 있는, 낯설지 않은 깨끗하고 차가운 비누 향 같은 것.
그녀의 발이 문턱 안쪽에서 잠깐 멈췄다.
창가 쪽 끝자리,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검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남자가 머그컵을 손에 쥔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옆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사람의 윤곽 자체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특히 한 시절을 통째로 흔들었던 사람이라면 더 그랬다.
권시혁이었다.
서윤은 순간 누가 먼저 자신을 발견하는 쪽이 덜 당황할지 계산했다. 돌아 나갈까 싶었지만 이미 문 위 종이 너무 분명하게 울렸다. 시혁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카페의 잔잔한 재즈도,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도 전부 멎은 것 같았다.
시혁의 표정은 놀란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원래도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예전보다 더 고요해진 인상이었다. 차갑다기보다 먼 사람 같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의 눈은 서윤을 한 번에 알아봤다.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시혁은 머그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네.”
그 한마디에 몇 년치 공백이 전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서윤은 괜히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그냥 다른 자리에 앉아도 되는데 카페가 생각보다 좁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모른 척하기에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주인이 카운터 안에서 웃으며 물었다. “두 분 아는 사이예요? 자리 합쳐 드릴까요?”
둘 다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주 잠깐의 침묵 끝에 서윤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따로 앉을게요.”
그런데 시혁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같이 앉아도 돼요.”
주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눈치 좋게 메뉴판만 내밀었다. 서윤은 잠깐 시혁을 봤다. 시혁도 자신이 먼저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그럼,” 서윤이 작게 말했다. “실례 좀 할게.”
맞은편 자리에 앉자 테이블 위 작은 스탠드 불빛이 두 사람 사이를 둥글게 묶었다. 가까이서 본 시혁은 예전보다 더 말수가 적어 보였다. 머리는 대충 말린 듯했고, 손등에는 아주 옅은 시향지 자국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향을 다루는 사람 특유의 흔적이었다. 서윤은 그것을 보는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너무 많이 흘러버린 것 같기도 했다.
“여기 자주 와?” 그녀가 물었다.
“가끔.” 시혁이 짧게 답했다. “너는?”
“나도 가끔.”
어색한 대화였다. 둘 다 그걸 알고 있었다. 예전의 두 사람이라면 향 한 줄기만 맡아도 한 시간을 떠들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날씨보다 한 발짝도 더 못 나가는 상태였다.
서윤은 메뉴판도 제대로 보지 않고 늘 마시던 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주인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창밖에서 빗방울 몇 개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뉨은 지붕 가장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자리를 옮겼다.
“회사 끝나고 온 거야?” 시혁이 먼저 물었다.
그 질문이 조금 의외라 서윤은 눈을 들었다. “티 나?”
“응.”
“얼굴이 그렇게 별로야?”
“얼굴보다 냄새.”
서윤은 웃을 뻔했다가 멈췄다. 정말 권시혁다운 말이었다. 상처가 되기 직전까지만 정확한 말. 예전에도 그는 사람 표정보다 먼저 공기의 결이나 옷에 밴 냄새로 상태를 읽곤 했다.
“무슨 냄새인데?”
시혁은 잠깐 생각하듯 그녀를 봤다. “종이 너무 많이 만진 날 냄새. 형광등 오래 쬔 냄새. 커피는 많이 마셨는데 한 모금도 못 쉬고 넘긴 사람 냄새.”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몇 년 만에 재회한 사람 앞에서 위로받을 줄은 몰랐다. 더 정확히는, 저 사람은 여전히 자신을 그런 식으로 읽는구나 하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을 눌렀다.
“너는?” 서윤이 되묻듯 말했다. “여전히 이상한 표현 잘하네.”
“이상했어?”
“아니. 정확했어.”
시혁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컵을 들었다. 뜨거운 김이 그의 턱선을 스쳤다. 서윤은 그의 손끝을 잠깐 봤다. 길고 마른 손가락 끝이 머그컵 손잡이를 무심하게 걸고 있었다. 대학 시절, 실험실에서 향료 병을 다루던 손과 똑같았다.
기억은 생각보다 무례해서, 준비도 없이 오래전 장면 하나를 불쑥 꺼내 놓는다. 늦은 밤 학교 도서관 창가 자리, 노트북 대신 시향지를 늘어놓고 있던 시혁, 그런 그를 보며 미쳤다고 웃다가도 결국 옆에 앉아 향을 맡았던 자신. 누구보다 빨리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고 믿었던 시절.
그리고 끝내 지켜 주지 못했던 순간.
서윤은 손끝으로 컵 받침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두드렸다. 버릇처럼.
시혁의 시선이 잠깐 그 손끝에 머물렀다. “그 습관 아직도 있네.”
“너도.” 서윤은 시혁이 컵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보고 말했다. “긴장하면 그러잖아.”
“안 긴장했는데.”
“그래.”
서윤이 바로 받아치자 아주 미세하게, 정말 아주 미세하게 시혁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 짧은 표정 하나가 낯설고도 익숙했다. 그녀는 그제야 조금 숨이 쉬어졌다.
커피가 나왔다. 첫 모금을 마시자 혀끝에 산미가 번졌다. 카페 안은 따뜻했지만 서윤의 어깨엔 아직 바깥의 습기가 남아 있었다. 시혁이 그녀의 젖은 소매를 한번 보고는 카운터를 향해 손을 들었다.
“담요 하나 빌릴 수 있어요?”
서윤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몇 년 만에 보자마자 그런 말부터 하는 거 좀 웃긴데.”
“그러게.”
그는 민망해하지도 않고 답했다. 오히려 그 담백함 때문에 서윤은 더 말문이 막혔다. 카페 주인이 작은 무릎담요를 가져다주자 시혁은 그것을 서윤 쪽으로 밀어 두었다. 마치 예전에도 늘 그렇게 했던 사람처럼.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담요를 무릎 위에 올렸다. “고마워.”
“응.”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이번 침묵은 처음보다 덜 불편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상대가 너무 낯설지는 않은 상태. 오히려 그 침묵 안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느낌이었다.
서윤은 창밖을 보며 물었다. “요즘 뭐 해?”
“그냥 작업.”
“어디서?”
시혁은 잠깐 망설이더니 말했다. “근처에 작업실 있어.”
“아직도 향 해?”
그 질문은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잔인할 수 있었다. 서윤도 묻고 나서 알았다. 하지만 시혁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서윤은 괜히 목이 말랐다. 예전의 권시혁은 천재라는 말이 가벼워 보일 정도로 향에 미쳐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자신을 설명하는 데 가장 작은 문장만 썼다. 그 사이에 무슨 시간이 있었을지, 서윤은 다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도 그 일부였을지 몰랐다.
“넌?” 시혁이 물었다.
“회사 다녀. 브랜드 쪽.”
“잘 어울리네.”
서윤은 짧게 웃었다. “안 어울려.”
“왜.”
“이제는 감각보다 보고서가 더 중요해서.”
시혁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창가에 걸린 말린 꽃다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예전엔 네가 제일 먼저 냄새를 찾았는데.”
서윤의 심장이 아주 작게 철렁했다. 그건 누구도 모르는 종류의 말이었다. 대학 시절, 향 관련 수업도 아니었는데 복도에서 스쳐 가는 냄새 하나에 멈춰 서서 “방금 뭐였지?” 하고 먼저 고개 돌리던 사람은 늘 서윤이었다. 시혁은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보면서도 결국 자신이 맡은 걸 설명해 주곤 했다. 두 사람의 시작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냄새를 같이 붙잡았던 순간들이었다.
“사람 안 변한다더니.” 서윤이 가볍게 넘기려 했다. “너도 아직 남 냄새부터 읽잖아.”
“그건 일이라서.”
“나는?”
시혁이 그녀를 봤다. 대답이 아주 조금 늦었다. “너는… 원래 그랬고.”
서윤은 그 문장의 빈칸을 너무 많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화제를 돌렸다. “작업실 근처라고 했지. 여기서 멀어?”
“안 멀어.”
“늦게까지 해?”
“시간 정해 놓고 하진 않아.”
“그럼 거의 밤새네.”
시혁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꼭 예전의 어두운 실험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구보다 밝은 향을 만들면서 정작 본인은 늘 한밤중에만 살아 있는 사람.
카페 천장에 달린 작은 풍경이 바람에 흔들렸다. 주인은 마감 준비를 시작했고, 손님도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서윤은 시계를 봤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리를 뜨는 것이 아쉬웠다.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던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데, 고작 이 정도 대화로 끝나 버리면 정말 다시 남남이 될 것 같았다.
서윤이 컵을 내려놓았다. “나 갈게.”
“응.”
시혁도 바로 일어났다. 마치 자신도 어차피 나갈 생각이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카운터에서 각자 계산하려는 순간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서비스 드릴게요. 비 오는 날 마지막 손님은 왠지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서윤이 손사래를 쳤지만 주인은 완강했다. 결국 두 사람은 어정쩡하게 감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어느새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골목 아래쪽으로 도시 불빛이 물에 젖어 번졌다. 뉨은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계단 옆 화분 사이로 사라졌다.
한 우산 아래 설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각자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기엔, 방금까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시간이 너무 선명했다. 서윤이 우산을 펼치는 사이 시혁이 먼저 말했다.
“데려다줄까.”
“괜찮아. 버스 타면 돼.”
“늦었잖아.”
“너도 늦었고.”
“난 걸어가.”
“그럼 나도 걸어갈 수 있지.”
시혁은 잠깐 말이 없었다. 여전하네, 라는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서윤은 괜히 조금 얄미워졌다.
“왜. 아직도 사람 말 잘 안 듣는다고 생각해?”
“원래 안 들었잖아.”
“너한테는 더 안 들었지.”
그 말이 나오고 둘 다 아주 잠깐 멈췄다. 농담처럼 던졌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결이 있었다. 시혁이 시선을 비껴가며 낮게 말했다. “그건 맞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서윤의 집과 시혁의 작업실이 완전히 같은 쪽은 아니었지만 초반 길은 겹쳤다. 빗소리와 발소리 사이로 대화는 띄엄띄엄 이어졌다.
“회사 많이 힘들어?” 시혁이 물었다.
서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너무 쉽게 약해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앞에서는 이상하게 과장도 축소도 하기 싫었다.
“그냥.” 그녀가 말했다. “내가 잘하는 게 뭔지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느낌?”
시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들었다.
“기획이라는 게 원래 설명하는 일이잖아. 근데 요즘은 설명해도 아무도 들을 생각이 없는 데다, 다들 이미 정해 놓은 답만 원해. 그러니까 점점 나도 안전한 말만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지도 헷갈려.”
비가 우산 가장자리를 고르게 두드렸다. 시혁은 한참 뒤에야 짧게 말했다. “너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
서윤은 웃음이 나왔다. “몇 년 만에 봤으면서 어떻게 알아.”
“알아.”
그 한마디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더 세게 들어왔다. 서윤은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예전에는 늘 그랬다. 권시혁은 설명이 부족했지만, 가끔 그렇게 이상할 만큼 본질만 건드리는 말을 했다. 그래서 더 미웠고, 더 놓치기 어려웠다.
길이 갈라지는 모퉁이에 도착하자 시혁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이쪽.”
“응.”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오자 갑자기 다시 어색해졌다. 서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잘 지내, 는 거짓말 같고. 또 보자, 는 너무 성급해 보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더더욱 오늘 할 수 없었다.
그때 시혁이 먼저 말했다. “서윤아.”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시간이 한번에 들썩였다. 회사에서는 늘 채 대리, 채 팀원, 혹은 채서윤 씨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들조차 이름을 풀로 부르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낯설었다.
“왜.”
“커피 냄새 말고 다른 냄새 맡고 싶으면.”
시혁은 잠깐 말을 골랐다. 예전에도 그는 감정 얘기보다 향 얘기를 할 때 문장이 조금 길어졌다.
“작업실 와도 돼.”
서윤은 그를 바라봤다. 빗물에 젖은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어깨선을 희미하게 감쌌다. 무심하게 말했지만 그냥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그는 원래 자기 공간에 사람을 쉽게 들이지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던 사람에게는 더.
“갑자기?” 서윤이 물었다.
“갑자기는 아니지.” 시혁이 말했다. “방금 만났으니까.”
서윤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정말 이상한 논리였다. 그런데 그게 또 묘하게 그답기도 했다.
“위치 보내 줄 거야?”
시혁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번호 그대로야?”
서윤이 잠깐 망설였다. 바뀐 번호를 말하는 일조차 어딘가 새삼스러웠다. 그녀는 조용히 번호를 불러 주었다. 시혁은 입력한 뒤 곧바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서윤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주소 하나만 떠 있었다. 발신자 이름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그런데 그 숫자들이 이상하게도 오래전 필체처럼 느껴졌다.
“아틀리에 뉨.”
서윤이 화면을 읽듯 중얼거리자 시혁이 고개를 들었다.
“작업실 이름?”
“응.”
“고양이 이름이랑 같네.”
“걔 이름 먼저 땄어.”
“왜?”
시혁은 골목 끝을 한번 봤다. 아까 지붕 위에 있던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밤에만 나타나거든.”
그 말이 그냥 고양이 얘기 같지 않아서 서윤은 묻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 화면을 끄며 말했다. “언제 가면 되는데?”
“네가 오고 싶을 때.”
“대충 말하지 마. 그런 건 제일 곤란해.”
“그럼.” 시혁이 아주 잠깐 생각했다. “내일 저녁.”
서윤은 눈을 깜빡였다. 예상보다 빠른 제안이었다.
“내일?”
“싫으면 말고.”
“싫다는 건 아니고.”
“그럼 와.”
말은 무심했지만 서두르는 기색이 조금 있었다. 마치 말을 길게 하면 자신이 먼저 거둬들일까 봐 짧게 끝내는 사람처럼. 서윤은 그 조급함 같은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상하게 안심했다. 자신만 흔들리는 게 아니라는 뜻 같아서.
“알겠어.” 그녀가 말했다. “퇴근하고 갈게.”
시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약속이 된 얼굴이었다.
서윤은 다시 우산을 고쳐 잡았다. “그럼 가 봐.”
“응. 조심히 가.”
이번에는 정말 헤어졌다. 모퉁이를 돌아 몇 걸음 가다가 서윤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시혁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빗속에서 잠깐 멈춘 채 그녀가 돌아보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손을 들지도, 웃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뛰고 있었다. 밤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회사 일은 내일도 그대로일 테고, 대학 시절의 일은 아직 단 한 줄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달라진 건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 공기만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닫자 비 냄새 대신 익숙한 실내 공기가 올라왔다. 서윤은 신발도 채 벗기 전에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다. 주소 하나뿐인 메시지. 군더더기 없는 문자. 그녀는 한참 그 화면을 보다 결국 발신자 이름을 저장했다.
권시혁.
이름 세 글자가 저장되는 순간, 묻어 둔 시간이 완전히 과거로 남아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말렸다. 그리고 오늘 카페에서 맡았던 아주 미세한 향을 떠올렸다. 비누 같기도 하고, 차가운 종이 같기도 하고, 희미하게 나무 그림자 같은 잔향이 남는 냄새. 아마 작업하다 묻은 향료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향은 이상하게도 사람 하나의 현재를 전부 대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세상 밖으로 완전히 나오지 않은 사람. 그런데 완전히 꺼지지도 않은 사람.
서윤은 천천히 누웠다. 눈을 감자 카페 창가, 비에 젖은 언덕, 지붕 위 고양이,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너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라고 말하던 시혁의 목소리가 차례로 떠올랐다.
잠들기 직전, 그녀는 생각했다.
내일 정말 가게 되겠구나.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내일이 조금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