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카페 지붕 위 고양이는 하늘하늘

EP.2 약속된 다음날 저녁의 후속 접촉, 보고 후폭풍, 그리고 아직 미뤄 둔 작업실 문턱

보고는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아니, 정확히는 끝난 게 아니라 잘렸다. 채서윤이 두 번째 슬라이드를 넘기려는 순간 오리진 팀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채 대리, 이 방향은 이미 위에서 검토 끝났어요. 오늘은 그냥 경과 보고만 하죠." 회의실 안에 있던 다섯 명 중 서윤의 눈을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 대리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우스를 조용히 굴렸고, 나머지는 각자의 컵이나 창밖을 바라봤다. 서윤은 발표 자료를 닫고 자리에 앉았다. 손끝이 먼저 반응했다. 테이블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것, 그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회의가 끝난 뒤 사무실로 돌아오는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서윤은 자기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켜놓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도심의 오전이 밝고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 바깥 어딘가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자기 감각을 제대로 펼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서윤은 의도적으로 지워버렸다. 그런 생각을 붙들고 있으면 오전을 버틸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메일을 정리하고 보고서 수정본을 올리는 동안, 서윤은 어젯밤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지만. 비 냄새, 고양이 카페의 낡은 나무 의자, 그리고 권시혁이 처음 이름을 부르던 순간. 서윤아. 그 두 음절이 오전 내내 귓가 어딘가에 붙어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서윤은 가방을 챙기면서 잠깐 멈췄다.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는 척했지만, 사실 그건 고민이 아니었다. 이미 어젯밤에 결정이 난 일이었다. 내일 저녁, 언덕 위로 오라는 말에 알겠다고 했고, 그 말은 서윤이 한 말이었다. 그러니 가야 했다. 언덕은 낮에 보면 별것 없는 오래된 주택가 골목이었지만, 저녁이 되면 조금 달랐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지고 골목마다 작은 불빛들이 새어 나왔다. 서윤은 어젯밤처럼 언덕 입구에서 잠깐 숨을 고른 뒤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젯밤보다 덜 젖은 공기였고,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대신 낙엽 냄새가 더 선명했다. 밟힌 낙엽에서 올라오는 차갑고 습한 냄새. 서윤은 그 냄새를 맡으면서 걸음을 조금 늦췄다. 언덕 위 고양이 카페는 어젯밤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젯밤이 워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탓에 카페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왔고, 입구 앞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화분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서윤은 그 고양이가 어젯밤에 지붕 위에 있던 것과 같은 고양이인지 알 수 없었다. 시혁은 카페 안에 있지 않았다. 서윤은 잠깐 안을 들여다보다가 카페 옆 골목 쪽을 확인했다. 시혁은 골목 초입에 있는 낡은 벽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하늘이라기보다 건물 지붕선과 전깃줄이 교차하는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윤이 가까이 가자 그가 먼저 알아챘다. "왔네." "응." 서윤은 그 옆에 섰다. "기다렸어?" "조금." "얼마나." "모르겠어. 어두워지기 전부터." 서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다 그냥 뒀다. 어두워지기 전부터 여기 있었다는 말이, 기다렸다는 말보다 솔직하게 들렸다. 둘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골목 쪽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카페 사장이 바깥에 내놓은 것인지,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인지 모를 의자였다. 서윤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깐 앞을 바라봤다. 골목 저편으로 도시의 불빛이 흐릿하게 보였다. "오늘 보고 어땠어?" 시혁이 먼저 물었다. 서윤은 잠깐 생각했다. 회사에서는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언제나 계산이 먼저였다. 어떻게 말해야 손해가 없는지, 어디까지 말해야 너무 감정적으로 보이지 않는지. 그런데 지금 이 골목에서, 시혁 앞에서는 그 계산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 "잘렸어. 두 번째 슬라이드에서." "발표가?" "방향이. 위에서 이미 결론 났다고. 경과 보고만 하래." 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동정하는 척 뭔가를 말해주는 것보다 그냥 듣고 있는 쪽이 더 편했다. "그냥 접으면 되는 거잖아." 서윤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안이 틀린 게 아니라 타이밍이 안 맞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버틸 수 있거든." "그렇게 생각해?"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하려고 한다는 말과 생각한다는 말은 다른 말이었다. "해외에 비슷한 거 나왔다는 거 알아?" 서윤이 대신 물었다. "어떤 거?" "내가 작년에 냈던 기획이랑 방향이 거의 같은 향수 브랜드. 스토리텔링 기반으로 제품마다 사람 이야기를 붙이는 방식.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요즘 많이 돌아다니는 레퍼런스야." 시혁이 잠깐 서윤을 봤다. "그 사람들이 봤겠네." "팀장은 그냥 해외 트렌드 따라가는 거라고 했어." "네 안 보고?" "아마도." 서윤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표정을 정리했다. 분한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분하긴 한데,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은 피로였다.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에 대한 피로. 설명하고, 증명하고, 또 설명하고. "맞는 감각이었는데도 계속 설명해야 하는 게 지친다." 서윤은 말하고 나서 조금 놀랐다. 그 말은 회사에서는 물론이고 소희한테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시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너무 솔직했나 싶어 말을 돌리려다가 그냥 뒀다. 이미 꺼낸 말이었다. "나도 그랬어." 시혁이 말했다. 짧고 담담한 말이었는데, 그 안에 뭔가 오래된 무게가 있었다. 서윤은 그 말을 듣고 시혁을 봤다. 그가 시선을 골목 저편에 두고 있었다. 옆모습이 어젯밤과 비슷하게 무표정했지만, 지금은 그 무표정이 다르게 읽혔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 "지금도?" 서윤이 물었다. "지금은 설명할 사람 자체가 없으니까." 그 말이 쓸쓸하게 들렸다. 서윤은 뭔가 말하려다가 참았다. 위로처럼 들리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시혁에게 위로처럼 들리는 말은 대부분 정확하지 않은 말이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골목 끝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낙엽 몇 장이 발 앞을 지나갔다. 카페 안에서 무언가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계피 같기도 하고, 구운 사과 같기도 한 냄새. "아까 뭔가 굽는 냄새 났는데." 서윤이 말했다. "사과 타르트 같은 거. 사장님이 가끔 저녁에 구워." "여기 자주 와?" "자주는 아니고. 뉨이 올라가는 날이 있어." 서윤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 되물었다. "뉨?" 시혁은 고양이 카페 지붕 쪽을 짧게 올려다봤다. "저기 종종 올라가는 고양이. 이름은 모르는데 내가 그냥 그렇게 불러." 서윤은 지붕 쪽을 올려다봤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뉨이야?" "밤에만 나와서." 서윤은 잠깐 그 대답을 생각했다. 밤에만 나와서 뉨. 아틀리에 뉨도 같은 이유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건 물어보지 않았다. 아직 그 안에 들어가지도 않은 사람이 이름의 의미를 묻는 건 너무 빠른 것 같았다. "오늘은 안 올라갔네." 서윤이 말했다. "날이 맑아서 그럴 수도 있어. 비 오는 날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 서윤은 웃었다. 억지로 웃는 게 아니라 그냥 웃음이 났다. 시혁은 그 웃음을 보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아까보다 조금 편한 얼굴이었다. "내일도 이쪽 와?" 서윤이 물었다. "왜." "그냥. 어제 약속을 이어 가는 건지, 아니면 이게 마지막인지 알고 싶어서." 시혁이 서윤을 봤다. 서윤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작업실에 들어오고 싶으면 말해." "오늘은 아니야." "알아." "내일도 모르겠어." "응." 그 짧은 대화가 이상하게 정직했다. 서윤은 자기가 왜 아직 들어가지 않으려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들어가면 뭔가가 달라질 것 같았다. 달라지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라, 달라진 뒤에 또 잃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시혁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재촉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네가 했던 말." 서윤이 말했다. "이야기가 담긴 향수 만들고 싶다고 했잖아." 시혁이 잠깐 멈췄다. "그랬나." "했어. 귀가길에서. 내가 기억해." 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 오래됐는데 제대로 말로 꺼낸 적은 없었어." 서윤은 가방 끈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향수가 아니어도 돼. 어떤 형태든 간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거. 그게 뭔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알 필요 없잖아." "그건 그렇지." 서윤은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어젯밤보다 별이 더 잘 보였다. 구름이 걷혔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젯밤에는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감당하느라 하늘을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오늘 고마웠어." 서윤이 말했다. "뭐가." "들어줘서." 시혁은 잠깐 서윤을 봤다가 다시 앞을 봤다. "별거 아니야." "별거 맞아." 서윤은 웃으며 말했다. "회사에서는 아무도 그냥 들어주지 않거든. 다들 다음 말 준비하고 있어." 시혁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서윤에게는 충분히 들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도 그랬다. 권시혁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다음 말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였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됐다는 걸 서윤은 몸으로 먼저 알았다. 더 앉아 있으면 더 많은 말이 나올 것 같았고, 오늘 저녁은 이 정도가 적당했다. 너무 많이 꺼내면 내일이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나 이만 가볼게."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가." 서윤은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골목 쪽으로 몇 걸음 걸었다가 돌아봤다. 시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부터 거기 앉아 있었던 것처럼. "내일도 뉨 올라오면 알려줘." 시혁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 애매할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서윤은 그걸 알아봤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서윤은 오늘 저녁 내내 작업실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어가고 싶다는 말도, 언제 들어가도 되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어떤 문은 서두르면 안 됐다. 아직 그 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소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보고 어땠어? 밥은 먹었어? 서윤은 잠깐 생각하다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밥 먹었어. 보고는 나중에 말해줄게. 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버스가 오기까지 아직 몇 분이 있었다. 서윤은 정류장 유리벽에 기대어 언덕 쪽을 한 번 돌아봤다. 불빛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낙엽 냄새가 여기까지 흘러오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 저녁은 회사에서보다 더 많은 말을 했고, 더 솔직했다. 그 사실이 서윤을 조금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가벼웠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앞에서 솔직하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고, 서윤은 버스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