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지난 지 두 시간이 넘었는데도 채서윤의 책상 위에는 아직 서류가 쌓여 있었다.
오전 보고에서 잘린 기획안. 팀장이 회의실 문을 나서며 던진 말, "채 대리는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해요"가 오후 내내 귓속에서 맴돌았다. 서윤은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보다가 커서를 움직이지 않은 채 손끝으로 마우스 옆면을 두드렸다. 딱, 딱, 딱. 일정한 박자로. 생각이 깊어질수록 손이 먼저 움직이는 버릇이었다.
옆 자리에서 김 대리가 자리를 정리하며 "먼저 갈게요" 하고 작게 말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오늘 오후 들은 말 중에 가장 무해한 말이었다.
사무실이 비어 갈수록 형광등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서윤은 결국 파일을 닫았다. 저장하지 않고. 어차피 오늘 더 손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코트를 집어 들면서 그제야 시혁이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어젯밤 언덕길, 헤어지기 직전에 그가 툭 던진 것처럼 말했던 것. "내일 저녁에 시간 있으면 와." 그게 전부였다. 장소를 따로 설명하지도 않았다. 아틀리에 뉨. 서윤이 아직 한 번도 안에 들어가 본 적 없는 그 공간.
어젯밤에도 오늘 밤에도 그 문 앞까지는 갔었다. 문턱 밖에서 목소리를 주고받고, 언덕길을 걷고, 카페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그런데 막상 들어가는 건 계속 다음으로 미뤄졌다.
서윤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연락을 먼저 할 필요는 없었다. 가면 되는 거였다.
언덕은 저녁 여섯 시가 지나면 어두워졌다. 서윤은 골목 입구에서 잠깐 멈췄다. 낮에 오리진 사무실 안에서 맡은 공기, 복사지와 커피와 아무도 창문을 열지 않는 밀폐된 공간의 냄새가 아직 코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냄새가 오늘 하루의 질감이었다. 무겁고 납작하고 환기가 안 되는.
계단을 올랐다. 아틀리에 뉨의 문 앞에 섰을 때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창문 유리가 두꺼워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는데, 빛의 색이 달랐다. 사무실 형광등처럼 하얗지 않고 조금 더 노랬다. 서윤은 잠깐 그 불빛을 바라봤다가 문을 두드렸다.
"응."
대답이 바로 왔다. 서윤은 손잡이를 잡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냄새가 먼저 왔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냄새였다. 나무와 알코올, 그리고 그 아래 깔린 무언가. 오래된 것과 새것이 섞인 것 같은, 하지만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낯선 방식으로 선명한 공기. 서윤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자기도 모르게 숨을 한 번 더 들이켰다.
공간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한쪽 벽 전체가 선반이었고, 크기가 다른 갈색 유리병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병마다 손으로 쓴 라벨이 붙어 있었는데, 글씨가 너무 작아서 입구에서는 읽을 수 없었다. 가운데에는 작업대가 있었다. 나무 상판에 얼룩이 여러 겹 겹쳐져 있었고, 그 위에 시향지 묶음과 스포이트, 작은 비커들이 놓여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낡은 스탠드 조명이 있었는데, 아까 밖에서 봤던 노란 불빛이 거기서 나오고 있었다.
시혁은 작업대 앞에 서 있다가 서윤이 들어오는 걸 보고 고개를 들었다. 손에 시향지를 들고 있었다.
"왔어."
"응."
서윤은 문을 닫고 한 걸음 더 들어왔다. 발밑에서 나무 바닥이 조금 삐걱거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좋았다. 오리진 사무실 바닥은 카펫이라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시혁은 다시 시향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서윤에게 앉으라고 말하지도, 어디 봐도 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기 일을 계속했다. 그게 오히려 편했다. 서윤은 선반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라벨의 글씨가 보였다. 대부분 숫자와 약어였다. 날짜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고, 짧은 메모 같은 것도 있었다. 한 병에는 '비 온 뒤 돌바닥'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병에는 그냥 '11월 새벽'이었다.
서윤은 손을 뻗다가 멈췄다.
"만져봐도 돼?"
"뚜껑은 열지 마."
서윤은 '11월 새벽'이라고 적힌 병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유리가 차가웠다. 뚜껑을 열지 않았는데도 손바닥에 닿는 촉감만으로 뭔가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겠지만.
"이게 다 네가 만든 거야?"
"응."
"언제부터?"
시혁이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병을 다시 선반에 올려놓고 그를 봤다.
"오래됐어." 그게 전부였다.
서윤은 더 묻지 않았다. 선반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라벨들을 읽었다. '여름 도서관', '버스 창문', '할머니 집 마루'. 어떤 것들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오히려 낯설었고, 어떤 것들은 너무 짧아서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작업대 앞에 낡은 의자가 하나 있었다. 시혁이 쓰는 것과 다른 의자였다. 서윤은 거기 앉았다. 시혁은 여전히 시향지를 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서윤은 조용히 그를 지켜봤다.
오전에 팀장이 "현실적으로 생각해요"라고 했을 때, 서윤은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회의실 안에서 자신이 내놓은 기획안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게 오늘 하루 가장 무거운 부분이었다. 틀렸다는 게 아니라, 맞는 걸 알면서도 접었다는 것.
그런데 지금 시혁은 눈을 감고 시향지를 코 가까이 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아무도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 그냥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당연해 보여서 서윤은 잠깐 어딘가 아린 것을 느꼈다.
"뭐 만들고 있어?"
시혁이 눈을 떴다. 시향지를 내려놓고 서윤 쪽을 봤다.
"아직 모르겠는 것."
"모르겠는 것?"
"이름이 없어. 아직."
서윤은 턱을 괴었다. "이름 없이 만들어?"
"이름 먼저 있으면 냄새가 거기 맞춰지거든. 그게 싫어."
서윤은 그 말을 잠깐 곱씹었다. 오리진에서는 항상 이름이 먼저였다. 컨셉이 먼저 있고, 타겟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거기 맞는 감각을 끼워 넣었다. 서윤이 기획안을 낼 때도 그 방식을 따랐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다 완성은 돼?"
"돼. 언제인지 모를 뿐이지."
"그게 답답하지 않아?"
시혁이 서윤을 봤다. 무심한 눈빛이었는데, 잠깐 뭔가를 읽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오늘 힘들었지."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혁이 선반 쪽으로 걸어가더니 병 하나를 꺼냈다. 라벨을 서윤에게는 보여 주지 않고 뚜껑을 열어 시향지에 살짝 묻혔다. 그러고는 서윤 쪽으로 내밀었다.
"맡아봐."
서윤은 시향지를 받아 들었다. 천천히 코 가까이 가져갔다.
처음에는 차가운 느낌이었다. 공기처럼 얇고, 그런데 그 안에 뭔가 단단한 것이 있었다. 나무 같기도 하고, 오래된 종이 같기도 했다. 그다음에 조금 더 깊은 것이 왔다. 먼지가 아닌 먼지, 시간이 쌓인 곳에서만 나는 냄새. 서윤은 눈을 감았다.
도서관이었다. 정확히 어느 도서관인지는 모르겠는데, 오래된 열람실. 나무 책상과 낡은 책들과 에어컨이 없어서 창문을 열어 뒀던 여름. 서윤은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기말고사 전날 밤, 시혁이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눈을 뜨자 시혁이 자기를 보고 있었다.
"뭐야, 이거."
"말해봐."
서윤은 시향지를 다시 봤다. "도서관이야. 오래된 데. 여름에 창문 열어놓은."
시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는데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맞아?"
"비슷해."
서윤은 시향지를 돌려줬다. 손끝에 냄새가 조금 남아 있었다. "이거 언제 만든 거야?"
"한참 됐어."
"이름은?"
"없어."
서윤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도서관 밤 11시."
시혁이 서윤을 봤다.
"너무 구체적이야?"
"아니."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나쁘지 않아."
서윤은 작업대 위를 둘러봤다. 시향지 묶음, 작은 메모지, 연필. 메모지에는 숫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비율이나 배합 같은 것인지 서윤은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숫자들이 어딘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리진 보고서에 들어가는 숫자들과 달리. 그건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숫자들이었고, 여기 있는 건 아직 어디로 갈지 모르는 숫자들이었다.
"여기서 매일 이래?"
"응."
"보고 없이?"
시혁이 서윤을 봤다. "보고를 왜 해."
서윤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웃지는 않았다. 그냥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 어딘가에 걸렸다. 보고를 왜 해. 당연한 말인데 오늘 하루를 지나온 서윤에게는 그게 당연하게 들리지 않았다.
스탠드 조명이 작업대를 비추고 있었다. 형광등이 아니어서 그림자가 부드럽게 떨어졌다. 서윤은 자신이 오후 내내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아챘다. 팀장 앞에서, 회의실에서, 사무실 복도에서. 그게 지금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시혁이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서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거기 있어도 된다고 말하지도, 뭔가 도와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기 일을 했다. 서윤은 그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리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불안이었다. 뭔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뭔가를 보여 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데 여기서는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공기 자체가 달랐다. 빠르지 않고, 결론을 재촉하지 않고, 뭔가를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시혁이 새 시향지를 꺼내 다른 병의 내용물을 묻혔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오래 들고 있었다. 서윤은 그 모습을 봤다. 향을 맡을 때 그의 얼굴이 달라졌다. 무심하던 눈빛이 사라지고, 뭔가를 안쪽으로 따라가는 것 같은 집중이 생겼다. 그 표정을 서윤은 대학 시절에도 본 적이 있었다.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그거 뭐야?"
시혁이 눈을 떴다. 잠깐 생각하더니 시향지를 서윤에게 건넸다.
이번엔 달랐다. 훨씬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 안에 뭔가 둥근 것이 있었다. 서윤은 눈을 감지 않고도 이미지가 떠올랐다. 오래된 나무 바닥, 햇빛이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오후, 아무도 없는 방.
"이건 집이야." 서윤이 말했다. "어릴 때 집."
시혁이 시향지를 받아 들고 다시 봤다. "비슷해."
"뭐라고 적어놨어?"
그가 잠깐 망설이다가 병의 라벨을 서윤 쪽으로 돌렸다. '기억 속 온도'라고 적혀 있었다.
서윤은 그 글씨를 봤다. 손으로 쓴 글씨여서 조금 흔들렸다. 기억 속 온도. 냄새로 온도를 담는다는 발상이 서윤에게는 생경했는데, 맡고 나서 들으니 그게 정확했다.
"이런 거 만드는 사람이," 서윤이 말했다가 멈췄다.
"뭐."
"아니, 그냥." 서윤은 손끝으로 작업대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런 거 만드는 사람이 왜 아무도 없는 데서 혼자만 하고 있나 싶어서."
시혁이 서윤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이 비난이 아니라는 걸 시혁도 알 것이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이 공간 안에 있는 것들, 선반을 가득 채운 병들, 라벨에 적힌 기억들, 아직 이름 없이 진행 중인 향들. 이것들이 여기서만 있다는 게 서윤에게는 어딘가 아까웠다. 틀린 말이 아니라 정확한 말이 아까운 것처럼.
시혁은 다시 작업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윤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스탠드 조명이 만드는 노란 빛 안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언덕이어서 바람이 셌다. 창문 유리가 가볍게 떨렸다. 그 소리가 오히려 안을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
서윤은 아까 맡은 냄새들을 다시 떠올렸다. 도서관 밤 11시. 기억 속 온도. 그 냄새들이 이름을 갖기 전에 이미 무언가였다는 것. 이름이 붙기 전에도 정확하게 어딘가를 건드렸다는 것.
오전 보고에서 팀장이 접으라고 했던 기획안이 다시 생각났다. 서윤이 그 안에서 말하려고 했던 것, 향수가 제품이 아니라 기억을 다루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 팀장은 그게 현실적이지 않다고 했다. 숫자로 설명할 수 없다고.
그런데 지금 서윤은 숫자 없이 그걸 이해하고 있었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시혁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메모지에 숫자를 더했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 그 손이 멈추지 않았다. 보고를 위해 쓰는 손이 아니었다.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손이 아니었다. 그냥 생각하는 손이었다.
서윤은 그 손을 한동안 봤다.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서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날 이유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리진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매일 아침 만들어졌다. 여기서 나가야 하는 이유는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서윤은 오늘 밤 처음으로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