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카페 지붕 위 고양이는 하늘하늘

EP.5 도서관의 낡은 종이 향이라는 공통 기억이 처음 공유된다.

오전 여덟 시 이십 분이었다. 채서윤은 지하철 출입구에서 올라오자마자 코트 깃을 세웠다. 어젯밤보다 바람이 더 차가웠다. 아니, 실제로 더 차가운 건지 아니면 몸이 아직 어젯밤 아틀리에 뉨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어서 그 차이를 더 선명하게 느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회사 건물이 저 앞에 보였다. 서윤은 걸으면서 어젯밤을 떠올렸다. 처음 들어간 작업실. 선반 위에 줄 지어 놓인 갈색 유리병들. 향기가 층층이 쌓여 있던 공기. 시혁이 말 없이 시향지를 내밀던 손. 그리고 자기 코끝에 닿는 순간, 뭔가 오랫동안 잠가 두었던 서랍이 열리는 것 같았던 그 감각. 회사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복사지 냄새, 커피 자판기 냄새, 누군가의 향수가 엘리베이터 안에 남긴 잔향. 어젯밤과는 완전히 다른 층위의 냄새들이었다. 서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잠깐 눈을 감았다. 아직 거기 있었다. 어젯밤 작업실의 공기가 코 안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었다. '이상하다.' 그게 이상하다는 건 알았다. 실제로 냄새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냥 기억이 그렇게 느끼게 하는 거겠지. 그런데 그 기억이 생각보다 훨씬 또렷하게 하루를 시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전 회의는 예상대로였다. 팀장은 지난 기획안 후속 처리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언급이라기보다는 생략에 가까웠다. 이미 그 안은 없는 것처럼 취급되었고, 다음 분기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서윤은 회의 테이블 끝에 앉아 노트에 몇 가지 키워드를 받아 적으면서, 자기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오후가 되었다. 김 대리가 옆 자리에서 조용히 말을 걸었다. "채 대리, 어제 보고 자료 혹시 최종본으로 공유됐어요?" 서윤은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아, 네. 어제 저녁에 올렸어요." 김 대리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다시 모니터를 돌아봤다. 그게 끝이었다. 어젯밤 기획안에 대해 아무도 더 묻지 않았다. 아무도 왜 그게 접혔는지 묻지 않았고, 서윤도 꺼내지 않았다. 서윤은 화면을 보면서 손끝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아주 천천히 두드렸다. 이 하루가 어젯밤과 같은 날이라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뭔가가 열렸다. 아직 정확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열린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는 그 어떤 것도 열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회의는 진행되고 메일은 오고 가고 보고서는 수정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서윤의 감각을 건드리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서윤은 자신이 언덕을 다시 오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딱히 결심을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게 오늘 저녁의 당연한 방향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어젯밤에 시혁이 뭔가를 약속한 건 아니었다. 그냥 헤어지면서 "또 와도 돼"라는 말을 했다. 서윤은 그 말을 초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잠깐 생각했다가, 이미 몸이 먼저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언덕은 어젯밤보다 덜 미끄러웠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서윤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걸으면서 고양이 카페 쪽이 아니라 아틀리에 뉨 방향으로 바로 올라갔다. 카페 앞을 지날 때 유리창 너머로 불빛이 보였고, 지붕 위에 고양이가 있는지 확인하려다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 작업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노크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기다려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어젯밤에 들어갔을 때는 시혁이 먼저 문을 열어 줬다. 오늘은 그가 안에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올라왔다. 서윤은 손을 들어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시혁은 서윤을 보고 특별히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냥 조금 보다가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 서윤은 들어갔다. 작업실은 어젯밤과 똑같았다. 선반의 유리병들, 작업대 위의 시향지 묶음, 창가의 낮은 조명. 달라진 게 있다면 오늘은 작업대 위에 뭔가 새로 펼쳐져 있었다. 작은 노트와 연필 몇 자루, 그리고 뚜껑이 열린 채 놓인 유리병 하나. "방해한 거야?" 서윤이 물었다. "아니." 시혁은 작업대 쪽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어차피 막혀 있었어." 서윤은 벽 쪽 낮은 선반 앞에 서서 어젯밤에 자기가 맡았던 시향지가 어디 있었는지 눈으로 찾았다. 어젯밤에 시혁이 집어 들어 건네줬던 것. 도서관 어딘가 같다고 생각했던 그 향. "어제 그거," 서윤이 말을 꺼냈다. "여기 있어?" 시혁이 돌아봤다. "어떤 거." "낡은 종이 냄새 같은 거. 내가 처음 맡고 아무 말도 못 했던." 시혁은 잠깐 서윤을 봤다가 선반 쪽으로 걸어와 두 번째 줄에서 작은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 시향지에 조금 묻히고 서윤에게 건넸다. 서윤은 받아서 천천히 코 가까이 가져갔다. 맞았다. 이거였다. 건조하고 오래된 종이의 결, 그 위에 아주 얇게 얹힌 나무의 온기. 어젯밤에 이걸 처음 맡았을 때 아무 말도 못 했던 이유가 다시 느껴졌다. 말이 나오기 전에 뭔가가 먼저 움직이는 종류의 향이었다. "어디서 온 향이야?" 서윤이 물었다. "오래된 도서관 같은 데." 시혁이 말했다. "정확히는 책 사이에서 오래 눌려 있던 공기." 서윤은 시향지를 내리며 그를 봤다. "나 그 냄새 알아." 시혁이 잠깐 멈췄다. "대학교 때," 서윤이 말을 이었다. "3학년 때인가. 논문 자료 찾는다고 인문관 지하 서고를 허락받아서 들어간 적 있었어. 거기 오래된 책들이 있었는데, 들어가는 순간 이런 냄새가 났어. 그냥 먼지 냄새가 아니라, 종이가 오래 숨 쉬어 온 냄새." 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윤은 그가 듣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작업대 끝을 손으로 짚은 채 가만히 있는 자세가 그랬다. "너 거기 갔었어?" 서윤이 물었다. "응." 시혁이 짧게 말했다. "나도 거기 들어갔었어. 한 번." 서윤은 그 말을 들으며 뭔가가 조금 움직이는 걸 느꼈다. 같은 장소. 같은 냄새. 그런데 그때는 서로 그걸 알지 못했다. "언제?" "4학년 초." 시혁이 말했다. "프로젝트 자료 찾으러. 사서 선생님한테 따로 허락받아서." 서윤은 잠깐 계산했다. 자기가 거기 들어갔던 시기와 겹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에 각자 경험한 것이었다. 그런데 같은 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서윤이 말했다. 혼잣말에 가까웠다. "뭐가." "같은 냄새를 기억하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는 게." 시혁은 잠깐 서윤을 봤다. 그리고 작업대 쪽으로 돌아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서윤도 맞은편 낮은 선반 앞에 기대어 섰다. "그 냄새 좋았어?" 시혁이 물었다. "응." 서윤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좋았어. 그냥 좋은 게 아니라, 그 안에 있으면 뭔가 오래된 게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누가 밑줄 그어 놓은 책, 누가 접어 놓은 페이지. 그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는지 모르지만 냄새는 남아 있는 것 같은." 시혁은 노트를 펼쳐 뭔가를 짧게 적었다. 서윤은 그게 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그가 적는 걸 바라봤다. "나는," 시혁이 연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서고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걸 향으로 만들 수 있을까 였어." 서윤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들었어?" 서윤이 물었다. "시도는 했어." 시혁이 말했다. "근데 그때는 재료가 없었고, 기술도 부족했고." "지금은?" 시혁은 서윤을 봤다.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더 가깝게 만들 수 있어." 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시향지를 다시 한 번 천천히 맡았다. 이 향이 그 서고의 공기를 담으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라는 게 느껴졌다. 완성이 아니라 시도. 그런데 그 시도 안에 이미 뭔가가 살아 있었다. "나한테는," 서윤이 말했다. "그 서고 냄새가 이상하게 안심이 됐어. 오래된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거기 있다는 게." 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윤은 그 침묵이 동의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불편한 정적이 아니었다. 같은 기억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꺼내 놓은 뒤 그게 겹친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 같은 것이었다. 서윤은 창가 쪽을 봤다. 밖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언덕 아래 골목의 가로등이 유리에 반사되었다. "오늘 회사에서," 서윤이 말했다. "하루 종일 아무 냄새도 안 났어. 그냥 아무것도." 시혁은 그녀를 봤다. "사람이 많은데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게 더 이상한 거 알아?" 서윤이 계속 말했다. "다들 향수도 뿌리고 커피도 마시는데. 근데 그게 다 그냥 배경이야. 아무것도 남지 않는 냄새들." "여기는 달라?" 서윤은 잠깐 생각했다. "응." 그녀가 말했다. "여기는 냄새가 있어." 시혁은 시향지를 하나 더 집어 들어 뭔가를 묻히더니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서윤 쪽으로 밀어 놓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거기 두었다. 서윤은 가까이 가서 집어 들었다. 다른 향이었다. 이번엔 더 습하고 차가운 결이 있었다. 바깥 공기 같기도 하고, 밤의 어떤 질감 같기도 했다. "이건 뭐야?" "아직 이름 없어." 시혁이 말했다. "방향만 잡은 거." 서윤은 그 시향지를 들고 창가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창밖의 차가운 공기와 손에 든 시향지의 향이 묘하게 어울렸다. "첫눈 오기 전 공기 같아." 서윤이 말했다. 시혁이 고개를 들었다. "눈 오기 직전에 공기가 이렇게 달라지잖아." 서윤이 계속 말했다. "냄새가 없어지는 것 같으면서 실제론 뭔가 달라지는. 그 직전의 공기." 시혁은 잠깐 서윤을 봤다가 다시 노트를 펼쳐 뭔가를 적었다. 이번엔 좀 더 길게 적는 것 같았다. 서윤은 시향지를 내리며 그를 봤다. 그가 적는 모습이 어젯밤과 달랐다. 어젯밤엔 막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연필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뭔가 말해서 도움이 됐어?" 서윤이 물었다. "응." 시혁이 적으면서 말했다. 짧았지만 거짓말 같지 않았다. 서윤은 선반 앞으로 돌아와 아까 맡았던 도서관 향 시향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두 시향지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번갈아 맡아 봤다. 오래된 종이의 온기와 눈 오기 전의 차가운 공기. 전혀 다른 계절 같으면서 어딘가에서 이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이 두 개," 서윤이 말했다.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해." 시혁이 연필을 놓고 서윤 쪽을 봤다. "어떻게." "도서관에서 오래된 책 냄새 맡다가 창문 열면 이런 공기가 들어올 것 같아서." 서윤이 말했다. "겨울 직전의 공기가." 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윤은 그가 그 말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빛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향을 구상할 때만 살아나는 눈빛이라는 걸 서윤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어젯밤에도 봤던 것과 같은 눈빛이라는 건 알아챘다. "오늘도 늦었네." 서윤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가야 해?" 그 질문이 예상보다 자연스럽게 나왔다. 시혁은 자기가 그 말을 했다는 걸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물어봤다. 서윤은 잠깐 시향지를 내려다봤다가 선반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조금만 더 있다 갈게." 시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노트를 펼쳤다. 서윤은 선반 앞에 서서 유리병들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각각 어떤 향인지 다 알지 못했지만, 이 공간 전체가 어떤 감각으로 채워진 곳인지는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회사의 오후가 완전히 다른 나라처럼 느껴졌다. 서윤은 그 생각을 붙잡지 않았다. 그냥 지금 여기에 있었다. 선반 앞에 서서, 손끝으로 유리병 하나의 표면을 아주 가볍게 짚으면서. 작업실 안의 공기가 코에 닿았다. 오래된 종이와 나무와 어딘가 낯선 풀 냄새가 섞인 공기. 이 공기가 내일도 하루를 버티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윤은 그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