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카페 지붕 위 고양이는 하늘하늘

EP.6 서윤은 회사에서의 시간과 공방에서의 시간이 완전히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오전 열 시가 막 지났을 때, 채서윤의 책상 위에 팀장의 메모 한 장이 올라왔다. 손으로 쓴 메모였다. 볼펜 자국이 깊었다. '오후 2시 전에 수정안 주세요. 방향은 아시죠?' 방향은 아시죠. 서윤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방향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납작하게 느껴졌다. 어제도 그 전날도 같은 말을 들었다. 방향, 현실적으로, 시장성. 회사가 기획자에게 요구하는 언어는 늘 같은 형태였다. 감각을 지우고 숫자를 채워 넣는 것. 서윤은 메모를 서랍 위에 뒤집어 놓고 모니터를 켰다. 창 밖으로 오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무실은 아직 반쯤 비어 있었다.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누군가의 전화 통화 소리, 프린터가 종이를 뱉는 소리. 서윤은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채 잠시 그 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오전 열 시면 원래 머릿속이 이미 세 개쯤의 문장을 굴리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어떤 단어를 쓸 것인지,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풀 것인지, 보고 자료의 첫 슬라이드는 무엇으로 시작할 것인지. 서윤은 늘 그런 사람이었다. 생각이 먼저 달리고 손이 뒤따라오는 사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았는데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탁자 모서리를 손끝으로 한 번 두드렸다. 그리고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아틀리에 뉨의 공기가 아직 코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냄새가 아니었다. 냄새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것. 오래된 유리병과 에탄올과 꽃잎이 섞인 무언가. 시혁이 작업대 위에 늘어놓은 시향지들이 만들어 내는 특유의 공기. 서윤은 그 공기 속에서 한 시간 반쯤 앉아 있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시혁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이상하게 가득 찬 느낌이었다. 회사의 침묵과는 달랐다. 회사의 침묵은 비어 있었다. 아무도 진짜 말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생기는 침묵. 회의실에서 팀장이 기획안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일 때, 그 끄덕임 뒤에 따라오는 침묵. 그 침묵은 서윤을 눌렀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혼자 서 있는 느낌. 아틀리에 뉨의 침묵은 달랐다. 그 침묵은 무언가로 채워져 있었다. 시혁이 유리병 하나를 들어 올리고 코끝에 가져갔을 때, 그 짧은 동작 하나가 서윤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 동작이 끝나는 순간까지 공방 안의 시간은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서윤은 그 감각을 다시 불러오려다가 멈췄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수정안. 오후 두 시. 방향은 아시죠. 서윤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파일을 열었다. 지난번 기획안의 수정 버전이었다. 팀장이 빨간 메모를 달아 놓은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대중적으로', '이 부분 수치 근거 필요', '스토리보다 기능을 먼저'. 서윤은 그 메모들을 하나씩 읽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중적으로. 그 말이 뭘 뜻하는지 서윤은 알았다. 이야기를 빼라는 말이었다. 향수에 담긴 사연을, 그것을 고른 사람의 기억을, 그 기억이 만드는 감정을 빼고. 숫자와 기능과 유통 채널만 남기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하면 기획안은 통과될 것이다. 서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김대리가 옆 자리에 앉으며 커피를 내려놓았다. "수정안 작업해요?" 모난 데 없는 목소리였다. "네." 서윤이 대답했다. "팀장님이 오전 중에 한 번 보자고 하실 것 같던데요." 김대리는 말을 더 잇지 않았다. 그것이 배려인지 회피인지 서윤은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어요." 김대리는 자기 모니터를 켰다. 서윤은 다시 파일을 봤다. 열한 시가 됐다. 서윤은 빨간 메모 중 두 개를 처리했다. 수치를 추가하고, 한 단락의 순서를 바꿨다. 그런데 이야기 부분에서 손이 또 멈췄다. 팀장의 메모는 분명했다. '스토리 분량 줄이고 제품 스펙 강화'. 서윤은 그 문장 위에 커서를 올려놓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보고가 있었던 그날 오전이 떠올랐다. 팀장이 "채 대리는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해요"라고 말하던 목소리.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회사는 현실적인 곳이었다. 시장은 숫자로 움직였다. 감각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매출로 연결되지 않으면 회사 안에서는 증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서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알면서도 쓰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됐다. 서윤은 밥을 먹으러 나가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편의점 삼각김밥을 뜯으며 수정안을 계속 봤다. 이야기 부분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 줄이면 무엇이 남는지. 남은 것이 여전히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인지. 오후 한 시 반, 팀장이 자리로 왔다. "수정안 어떻게 됐어요?" 서윤은 화면을 팀장 쪽으로 돌렸다. "지금 마무리 중입니다." 팀장은 화면을 훑었다. 잠깐 멈췄다. "스토리 부분은요?" "아직 조율 중이에요." 팀장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채 대리, 방향 잡아드린 거 기억하죠? 제품 중심으로 가야 해요. 이야기는 부수적인 거예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시까지 올려줘요." 팀장이 돌아갔다. 서윤은 화면을 다시 바라봤다. 부수적인 것.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서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회사에서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오늘 처음 안 것은 아니었다. 입사 첫 해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사실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젯밤 때문이었다. 아틀리에 뉨에서 시혁이 유리병을 들어 올리던 그 순간. 아무 설명 없이 서윤에게 시향지를 건네던 그 동작. 서윤이 냄새를 맡고 잠깐 눈을 감았을 때, 시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반응을 지켜보던 그 시간. 그 공방 안에서는 아무것도 부수적이지 않았다. 유리병 하나, 시향지 한 장, 침묵 한 덩어리가 모두 중심이었다. 아무것도 줄이거나 빼라는 말이 없었다. 서윤은 손끝으로 탁자 모서리를 다시 두드렸다. 두 시가 됐다. 서윤은 수정안을 팀장에게 공유했다. 이야기 부분을 절반으로 줄이고 제품 스펙을 앞에 배치했다. 팀장이 원하는 방향이었다. 파일을 공유하고 나서 서윤은 잠깐 화면을 바라봤다. 수정된 기획안은 깔끔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리고 서윤이 처음에 담으려 했던 것도 없었다. 오후 세 시, 팀장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왔다. '이 방향이 맞아요. 수고했어요.' 서윤은 그 메시지를 읽고 화면을 내렸다. 수고했어요. 그 말이 어딘가 이상하게 공허했다. 잘했다는 말인데 무언가를 칭찬받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잘 치워 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서윤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잠깐 눈을 감았다. 오후 내내 회의가 이어졌다. 다른 팀의 기획 검토, 다음 분기 일정 조율, 예산 배분. 서윤은 회의실 한쪽에 앉아 메모를 했다. 필요한 말을 했다. 필요한 자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잘 돌아갔다. 아무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서윤은 내내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회의실 창 밖으로 오후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서윤은 누군가의 발표를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어젯밤 공방의 창문을 떠올렸다. 시혁의 작업대 위에 늘어선 유리병들이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각자 다른 색으로 빛나던 것. 서윤이 그 병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을 때 시혁이 "조심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던 것. 그 신뢰 같은 것. 회의실에서는 아무도 그런 식으로 기다려 주지 않았다. 여섯 시가 넘어 사무실이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했다. 서윤은 자리에 앉아 남은 메일 몇 개를 처리했다. 손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오늘 저녁 언덕을 오를 것인지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젯밤에도 갔다. 그 전날에도 갔다. 매일 가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보이는 것보다 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서윤은 가방을 챙겼다. 지하철 출입구를 올라오자마자 찬 공기가 얼굴을 쳤다. 서윤은 코트 깃을 세웠다. 언덕 방향으로 걸었다. 골목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잠깐 멈췄다. 오늘은 피곤했다. 몸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이. 수정안을 공유하고 나서 계속 그 공허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발이 언덕 쪽으로 움직였다. 언덕 위 고양이 카페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윤은 카페 앞을 지나쳐 공방 골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틀리에 뉨의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서윤은 잠깐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문을 두드렸다. "나야." 안쪽에서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발소리. 문이 열렸다. 시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작업 중이었던 것 같았다. 손에 시향지가 들려 있었다. 서윤을 보더니 문을 더 열었다. 말은 없었다. 서윤이 들어갔다. 공방 안의 공기가 즉각적으로 달랐다. 오늘은 무언가 더 날카로운 향이 섞여 있었다. 시트러스 계열의 무언가. 서윤은 코트를 벗으며 그 냄새를 천천히 들이켰다. "뭐 만들고 있어?" "아직 몰라." 시혁이 작업대 쪽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방향이 안 잡혀서." 서윤은 의자에 앉았다. 어젯밤과 같은 자리였다. 시혁은 작업대 앞에 서서 유리병 두 개를 번갈아 들어 올렸다. 코끝에 가져갔다가 내렸다가. 그 동작이 반복됐다. 서윤은 그 동작을 바라봤다. 회사에서 오후 내내 느꼈던 그 공허함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수정안은 이미 공유됐고, 팀장의 메시지는 이미 받았고, 내일도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종류의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 공방 안에서는 그 모든 것이 잠깐 다른 속도로 흘렀다. 회사에서의 여섯 시간과 이 공방에서의 한 시간이 같은 하루 안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오늘 힘들었어?" 시혁이 물었다. 작업대를 보면서였다. 서윤은 잠깐 생각했다. "수정안 냈어." "통과됐어?" "응." 시혁은 더 묻지 않았다. 서윤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은 교환이 이상하게 충분했다. 통과됐다는 말에 담긴 것을 시혁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것 같았다. 통과됐는데 왜 그 표정이냐고 묻지 않는 것. 그것이 서윤에게는 회사에서 하루 종일 받지 못한 어떤 종류의 이해처럼 느껴졌다. 시혁이 시향지 하나를 서윤 쪽으로 내밀었다. 서윤은 받아서 코끝에 가져갔다. 아까 공방에 들어오면서 맡은 그 날카로운 향이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맡으니 달랐다. 앞쪽에 시트러스가 있고 그 뒤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깔려 있었다. 나무 같기도 하고 마른 풀 같기도 한. "이게 뭐야." "아직 이름 없어." 시혁이 말했다. "방향이 두 개가 싸우고 있어서." "어떻게 싸워?" 시혁은 잠깐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앞에 있는 게 너무 선명하면 뒤에 있는 게 죽어. 근데 뒤에 있는 걸 살리려면 앞에 있는 걸 줄여야 하는데, 그러면 처음에 아무것도 안 느껴지거든." 서윤은 시향지를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좀 더 천천히 맡았다. 앞에 있는 날카로움과 뒤에 있는 따뜻함. 둘이 싸우고 있다는 말이 이해됐다. 그런데 동시에 그 싸움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둘 다 살면 안 돼?" 시혁이 서윤을 봤다. 짧게. "어렵지." 그가 말했다. "근데 그게 되면 제일 좋긴 해." 서윤은 시향지를 작업대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잠깐 그 말을 생각했다. 둘 다 살면 안 돼. 회사에서 팀장이 했던 말이 겹쳤다. 이야기는 부수적인 거예요. 숫자를 살리려면 이야기를 줄여야 한다. 앞에 있는 것을 살리려면 뒤에 있는 것을 죽여야 한다. 서윤은 그 생각을 말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공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작업대 위의 유리병들. 벽에 붙은 메모지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골목의 가로등. 시혁이 다시 작업에 집중하며 유리병을 들어 올리는 동작. 그 모든 것이 회사 사무실과 완전히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모든 것이 빨랐다. 마감, 수정, 보고, 메시지. 빠르게 처리하고 빠르게 넘어갔다. 그 속도 안에서 서윤은 늘 무언가를 빠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뭘 빠뜨리는지 말하기 어려운 것을. 이 공방에서는 달랐다. 시혁이 유리병 두 개를 번갈아 드는 데 오 분이 걸려도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서윤이 시향지를 들고 눈을 감아도 아무도 결론을 물어보지 않았다. 시간이 다른 단위로 흘렀다. 서윤은 그 차이를 오늘 처음 이렇게 선명하게 느꼈다. 어제도 왔었고 그 전날도 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수정안을 공유하고 온 날이었다.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절반으로 줄이고 온 날이었다. 그래서 이 공방의 속도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같은 하루 안에 두 개의 다른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서윤아." 시혁이 불렀다.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시혁이 유리병 하나를 들어 서윤 쪽으로 내밀었다. 이번엔 시향지가 아니라 병 자체였다. "이거 맡아봐. 뚜껑 열지 말고 그냥." 서윤은 병을 받아 코끝에 가져갔다. 유리 너머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향. 아까 시향지에서 맡은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날카로움이 없었다. 뒤에 있던 따뜻한 것만 남은 것 같았다. "이게 뒤에 있는 거야?" "응." "이게 더 좋은데." 시혁이 잠깐 서윤을 봤다. "그럼 앞에 있는 게 없으면 처음에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니까." "근데 이게 더 오래가잖아." 또 짧은 침묵이 왔다. 시혁은 병을 다시 받아 작업대 위에 내려놨다. 서윤은 그 동작을 보면서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췄다. 지금 하려던 말이 향수 이야기인지 다른 이야기인지 서윤 자신도 잘 몰랐다. "배고프지 않아?" 시혁이 물었다. 서윤은 웃었다. 웃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나왔다. "응, 좀." "편의점 갔다 와." "같이 가." 시혁은 앞치마를 벗었다.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이 공방 문을 나섰다. 골목 가로등 아래로 찬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서윤은 코트 깃을 다시 세우며 걸었다. 시혁이 옆에서 걸었다. 말이 없었다. 서윤은 그 침묵 안에서 오늘 하루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수정안, 팀장의 메시지, 회의실의 공기, 부수적이라는 말. 그것들이 이 골목 어딘가에 가만히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 아침이 되면 다시 그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들이 오늘 하루의 전부가 아니었다. 편의점 불빛이 보였다. 서윤은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